스킵네비게이션

'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더보기
한봉근(韓鳳根, 1894-1958)

한봉근(韓鳳根, 1894-1958) 아호가 금산(錦山)이던 그는 1894년 10월 23일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후쿠오카상업학교를 1년씩 다니며 수학했다. 20세 때부터 숙부 한춘옥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인 1919년 3월, 만주에 가 있으면서 신흥중학교에 다니는 아우 한봉인과의 연락 여부를 탐지코자 가택수색을 나온 순사를 구타하여 상해죄로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지자 만주행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독립군정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황상규의 권유로 7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1월말에 졸업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창단 취지에 호응하여 동참 의사를 미리 표해놓았었기에 창립단원 반열에 서게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이 추진해간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참여키 위해 1920년 3월경 밀입국하여 밀양 본가에 가있으면서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거사 때의 투탄요원으로 지명 받았다.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은신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밀고에 의해 1920년 6월 하순부터 경찰에 속속 체포되고 말아 거사결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도 밀양에서 붙잡혀갔으나 1차 조사만 받고 방면되었다. 그 무렵 일시 귀국해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과 동행하여 1921년 봄에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냈다. 1923년 초에 상해로 가서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고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어, 이후의 거사계획과 그 추진과정에 계속 관여하였다. 1926년 4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국내의거를 추진 중이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으로부터 폭탄 및 권총‧실탄 구입 의뢰를 받아 이행하였고, 나석주‧류자명·이승춘 3인과 함께 거사요원이 되어 동반 입국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나석주만 12월에 밀입국하여 서울에서 동척·식은 투탄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의거계획의 가담자였음이 드러나 재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광동성 광주로 옮겨가 활동하였기에 피체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28년경에 영고탑으로 돌아가 한춘옥의 농장에서 지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고, 내내 부산에서 거주하다 195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강세우(姜世宇, 1901~ ?)

강세우(姜世宇, 1901~ ?) 본명은 강비호돌(姜飛虎乭)이고, 일제 첩보문서에 강세위(姜世偉)로 적힌 경우도 있다. 1901년 8월 12일,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중평장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경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분교의 속성과정으로 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옮겨갔고, 거기서 만난 김원봉과 뜻이 통하여 장차 행동을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 10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가서 영어전수학교를 거쳐 중화대학에 입학하였고, 12월에 김원봉·곽재기 등이 한 달 전 창립한 의열단의 제1차 국내의거를 위한 폭탄을 구입코자 상해로 갔을 때 재회하고 합류하여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경 금릉대학에도 다녔다고 하며, 1925년에는 광동성 광주로 가서 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중국·인도·베트남·타이완 출신의 반제·반일 활동가들과 함께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1926년 8월 중산대학에서 열린 국치기념대회를 회장이 되어 주관하였고, 11월에는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중국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어 김원봉과 함께 무한(武漢) 방면으로 가서 북벌전에 참가하다 1927년 북경으로 옮겨가 의열단 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8년 중국군의 영관 장교로 복무 중이었음을 끝으로 그 후의 행적과 몰년은 미상이다.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아호는 약산(若山)이고, 중국에서는 진국빈(陳國斌) 등의 가명도 썼다. 1898년 음력 3월 1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김주익의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일장기 모독의 의거를 벌여 퇴학당하고 을강 전홍표가 교장인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와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 등에서 수학했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대로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배우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졸업 후 길림으로 데리고 가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사이에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추동한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하여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광동성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근 150명의 항일투사 겸 장래의 민족간부를 양성해냈다.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국외지역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일대 통합체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됨을 주도하여 의열단을 해체하고, 당 서기부장을 거쳐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쥐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 10월 무한에서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총대장이 되었고, 그 후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면서 대적선전공작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려갔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를 북상시켜 화북지역에서 대일작전을 벌여가도록 했으며, 화중·화남지역의 잔여 부대원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하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 29년 만인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니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안고 12월 2일에 환국하였다. 그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했으나, 영화 <암살>로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자는 경(敬)이고,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는 가명을 썼다. 1893년 2월 7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의 농민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신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귀향하여 1907년 광남학교(1년 후 청남학교로 개명) 교사가 되었다. 190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단)에도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청주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하여 피체, 구금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되어 풀려났다. 동년 7월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인 황상규를 만나 작탄투쟁을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숙의하였다. 10월에 김원봉이 규합해 온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 및 신철휴·윤세주와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12월에 김원봉·이성우·이종암과 함께 상해로 가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16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 무기류를 구입하여 안동현을 거쳐 국내로 밀송, 반입되게끔 하였다. 1920년 3월 20일경 밀입국하여 밀양으로 가서 신철휴·윤세주·한봉근을 투탄결행 요원으로 지명하였고, 서울 공평동 전동여관에 거처를 잡고 거사 지휘소로 삼았다. 경남 창원군 강상진의 집에 숨겨둔 폭탄 13개의 보관 책임자인 이수택에게 조속 결행의 뜻을 수차 전하고 넘겨주기를 요구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당하여 미뤄지고 있던 중에 6월 20일 서울에서 이성우·윤세주가 은신처 급습을 받아 경찰에 붙잡혀갔음을 알고 급히 피신하여 부산으로 갔다가 7월 5일 체포되었다. 8개월여의 경찰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어서는,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었음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이 오직 폭발탄과 육혈포밖에 구할 것이 없었노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고,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Play 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