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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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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아호는 약산(若山)이고, 중국에서는 진국빈(陳國斌) 등의 가명도 썼다. 1898년 음력 3월 1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김주익의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일장기 모독의 의거를 벌여 퇴학당하고 을강 전홍표가 교장인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와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 등에서 수학했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대로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배우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졸업 후 길림으로 데리고 가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사이에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추동한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하여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광동성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근 150명의 항일투사 겸 장래의 민족간부를 양성해냈다.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국외지역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일대 통합체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됨을 주도하여 의열단을 해체하고, 당 서기부장을 거쳐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쥐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 10월 무한에서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총대장이 되었고, 그 후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면서 대적선전공작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려갔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를 북상시켜 화북지역에서 대일작전을 벌여가도록 했으며, 화중·화남지역의 잔여 부대원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하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 29년 만인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니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안고 12월 2일에 환국하였다. 그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했으나, 영화 <암살>로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본명은 서영윤(徐永潤)이고, 서영림(徐永林)이라는 이명도 썼다. 1893년 3월 23일, 경북 달성군 성북면 산격리(현 대구 북구 산격동)에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혼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1월 단기과정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6월경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의 신설 분교에 들어온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고, 10월에 졸업생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등 무기류의 구입이 상해에서 성사되자 단장 김원봉의 명에 의해 1920년 3월경 서울로 잠입하여 인사동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 요원으로 지명 받고 대기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단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이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연이어 붙잡혀가자 민첩하게 피신하여 상해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의열단 본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에는 상해에 남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가 1922년 7월경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독일로 갔는데, 1923년 5월 28일 괴한의 피습을 받아 사망했다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호는 해영(海影)이고, 이명은 신우동(申愚童), 신우룡(申愚龍), 신룡(申龍)이었다. 1898년 5월 17일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치사리(현 대가야읍 고아리)에서 집안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하여 다니다 1918년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10월경 봉천에서 만나 뜻이 통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길림으로 가서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들과 합류하여 동지가 되고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고 단원이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기획, 추진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해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에서 폭탄 등 무기류를 구입한 때인 1920년 3월경, 명에 의해 동지들과 밀입국하여 경남 밀양으로 가서 한봉근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리고 4월 중순에 찾아온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의 일원으로 지명 받고 수락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 단원들이 연이어 체포되기 시작하니 재빨리 피신했는데, 그도 결국 7월 하순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6월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다 위장병이 심해져 1925년 7월 2일 가출옥 석방되었다. 1927년 9월 신간회 고령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1년 후 상무집행위원이 되어 변희용 지회장을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청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0년 1월 23일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종암(李鍾岩, 1896~1930)

이종암(李鍾岩, 1896~1930) 본명은 이종순(李鍾淳)이고, 외가 성을 따서 양건호(梁建浩)·양주평(梁州平)·양근오(梁槿吾) 등의 가명을 만들어 썼다. 1896년 음력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 백안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서 하급 이관(吏官)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들어간 대구농림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학비 조달이 어려워 잇달아 중퇴하였다. 그 후 독학하다 1914년 고모부의 후견으로 대구은행에 취직하고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여 결혼도 했다. 1917년 12월 은행에 입금된 1만 5백여 원의 거금을 빼돌려 잠적했다가 이듬해 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만주 봉천에서 만난 구영필(具榮佖)에게 7천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맡기고 4월에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로 가서 신흥중학교에 편입학하였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신흥무관학교로 옮겨갔고, 거기서 만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10월에 동창생 졸업자들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12월에 국외망명 때의 휴대금 중 잔액 3천원을 창단 직후 기획된 제1차 국내의거용 폭탄 등의 구입비로 제공하여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로 내려가 무기류를 구입할 수 있게끔 도왔다. 거사계획 실행을 위해 1920년 3월부터 속속 밀입국한 거개의 단원들과는 달리 단장의 명으로 상해에 잔류해 있다가, 거듭 지연되는 거사계획 추진실황의 점검을 명받아 1920년 7월 밀입국하였다. 단원 대부분이 경찰에 피체되었음을 알고는 남은 단원만으로라도 결행할 것을 시도했으나, 구영필의 사주를 받은 폭탄 관리자 이수택(李壽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 후 김상윤(金相潤)과 함께 밀양에 은신해 있던 중 만난 최수봉(崔壽鳳)에게 고인덕(高仁德)과 함께 제조한 폭탄 2개를 제공하여 12월 27일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실행케 하였다. 그리고는 서울로 옮겨가 은신해 있다가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북경의 단 본부로 가서 합류하였다. 1922년 3월 28일, 일제 군부의 거물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을 암살코자 의열단이 감행한 상해 황포탄 의거 때 오성륜·김익상에 뒤이은 제3선 저격수로 나섰으나 투척한 폭탄의 불발로 목적달성에 실패했는데, 현장 즉시탈출과 교묘한 변장으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 후 의열단 기밀부의 일원이 되어 간부로 활약했고, 단내 노선논쟁에서는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 단원들에 맞서 민족주의 노선을 고수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시도된 의열단의 광역 대규모 거사계획이 여러 이유로 실패함에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에 가 있다가 1925년 7월 폭탄 2개 등의 무기류를 휴대하고 단신 밀입국하였다. 1만원의 자금이 마련되면 일본 도쿄로 직행하여 폭탄거사를 감행하려 해서였다. 그러나 입국 전부터 동정이 밀보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던 나머지 1925년 11월 5일 대구 외곽의 은신처를 급습 당해 체포되고 말았고, 만 1년 후에 ‘경북 의열단사건’으로 신문 지면에 대서특필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법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얻은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매우 악화되고서야 1930년 5월에 가출옥되었으나 열흘 만인 5월 29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어 공훈이 기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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