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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창립의배경과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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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창립의배경과의의

“의열단 창립의 배경과 의의”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른 국제정세의 급변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고무되고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부분적으로 받은 상태에서 독립선언서의 발포로 시작된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에 입각한 맨손의 독립만세 시위로 전개되어 갔다.
그리하여 학생 ․청년 · 교사 등의 지식인층과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에 의해 전국 주요 도시로 파급되고, 다시 전국의 각 농촌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가던 중에 면사무소 및 경찰관서 파괴, 직원 구타 수준의 우발적 폭력 행사가 국지적 수준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 통치권력 자체를 겨냥한 전국적 차원의 조직적 폭력투쟁으로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김원봉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의 무의미함을 비판하며, 외교론보다는 무력항쟁 위주의 독립운동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듯이, 여준 · 조소앙 · 김좌진 · 황상규 등의 재(在)지린 독립운동가들도 독립군 조직에 의한 무장투쟁의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7일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었는데, 그러나 군대 조직과 운용에 소요될 인적 · 물적 자원의 미비라는 현실적 난관에 곧 직면하게 되었고, 이윽고 그 난경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방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방안이 국내방면의 작탄투쟁이었고,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 조직으로 결성된 조선독립군정사의 주도로 1919년 6월경부터 소수 정예의 결사대적 조직으로 운용될 작탄투쟁 행동대의 창설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11월 10일에 창립된 의열단인 것이다. 요컨대 의열단의 창립은 조선독립군정사 차원의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고, 군정사 재정책임자(회계과장)이던 황상규가 창단 과정을 준비하고 주도하였다.
그의 지도 아래 김원봉 · 김상윤 · 윤세주 · 한봉근 등의 밀양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후 의열단은 전후 23차례의 의열거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면서 일제의 강압통치에 분연히 맞섰다.
일제의 폭압에 목숨을 내걸고 대항한다는 의미도 띠었던 의열투쟁은 크게보면 민족사적 · 세계사적 정의 실현이라는 가치로부터 비롯된 행동양식이었다.
사회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민족말살을 노리고 자행된 일제의 한국강점과 식민통치가 20세기의 역사적 불의의 한 극치였다면, 의열단과 한국민족은 그 불의에 맞서서 정의의 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한 것이다.
한국광복군 창립 기념사진
한국광복군 창립 기념사진
조선의용대성립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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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창립1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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