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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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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자는 경(敬)이고,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는 가명을 썼다. 1893년 2월 7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의 농민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신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귀향하여 1907년 광남학교(1년 후 청남학교로 개명) 교사가 되었다. 190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단)에도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청주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하여 피체, 구금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되어 풀려났다. 동년 7월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인 황상규를 만나 작탄투쟁을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숙의하였다. 10월에 김원봉이 규합해 온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 및 신철휴·윤세주와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12월에 김원봉·이성우·이종암과 함께 상해로 가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16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 무기류를 구입하여 안동현을 거쳐 국내로 밀송, 반입되게끔 하였다. 1920년 3월 20일경 밀입국하여 밀양으로 가서 신철휴·윤세주·한봉근을 투탄결행 요원으로 지명하였고, 서울 공평동 전동여관에 거처를 잡고 거사 지휘소로 삼았다. 경남 창원군 강상진의 집에 숨겨둔 폭탄 13개의 보관 책임자인 이수택에게 조속 결행의 뜻을 수차 전하고 넘겨주기를 요구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당하여 미뤄지고 있던 중에 6월 20일 서울에서 이성우·윤세주가 은신처 급습을 받아 경찰에 붙잡혀갔음을 알고 급히 피신하여 부산으로 갔다가 7월 5일 체포되었다. 8개월여의 경찰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어서는,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었음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이 오직 폭발탄과 육혈포밖에 구할 것이 없었노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고,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봉근(韓鳳根, 1894-1958)

한봉근(韓鳳根, 1894-1958) 아호가 금산(錦山)이던 그는 1894년 10월 23일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후쿠오카상업학교를 1년씩 다니며 수학했다. 20세 때부터 숙부 한춘옥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인 1919년 3월, 만주에 가 있으면서 신흥중학교에 다니는 아우 한봉인과의 연락 여부를 탐지코자 가택수색을 나온 순사를 구타하여 상해죄로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지자 만주행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독립군정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황상규의 권유로 7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1월말에 졸업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창단 취지에 호응하여 동참 의사를 미리 표해놓았었기에 창립단원 반열에 서게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이 추진해간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참여키 위해 1920년 3월경 밀입국하여 밀양 본가에 가있으면서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거사 때의 투탄요원으로 지명 받았다.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은신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밀고에 의해 1920년 6월 하순부터 경찰에 속속 체포되고 말아 거사결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도 밀양에서 붙잡혀갔으나 1차 조사만 받고 방면되었다. 그 무렵 일시 귀국해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과 동행하여 1921년 봄에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냈다. 1923년 초에 상해로 가서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고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어, 이후의 거사계획과 그 추진과정에 계속 관여하였다. 1926년 4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국내의거를 추진 중이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으로부터 폭탄 및 권총‧실탄 구입 의뢰를 받아 이행하였고, 나석주‧류자명·이승춘 3인과 함께 거사요원이 되어 동반 입국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나석주만 12월에 밀입국하여 서울에서 동척·식은 투탄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의거계획의 가담자였음이 드러나 재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광동성 광주로 옮겨가 활동하였기에 피체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28년경에 영고탑으로 돌아가 한춘옥의 농장에서 지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고, 내내 부산에서 거주하다 195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호는 석정(石正)이고, 잘 알려진 이명은 윤소룡(尹小龍)이었다. 1900년 6월 2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에서 태어나, 이웃집의 약산 김원봉과 죽마고우로 자랐고 평생 동지가 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오성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의 항일결사 일합사에도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밀양면 독립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길림에서 황상규·김원봉과 재회하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였다. 창단 직후 기획되어 1920년 3월부터 추진되어간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동참코자 국내 잠입한 후 서울 인사동에 은신하며 대기하였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6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의거 결행은 좌절되고말았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는 중에도 간수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굴복시킬 정도의 결기를 드러냈다. 1927년 출옥 후 신간회 밀양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활동했고, 민족지로 거듭난 중외일보의 서무부장, 경남인쇄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며 부산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중국으로 재망명하여,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 2기와 3기의 교관이자 ‘김원봉의 오른팔’이 되어, 항일청년투사 양성과 졸업생의 국내·만주 특파공작을 주관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선전부 상무위원으로서 1935년 통일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창당 후에는 훈련부장과 당보 편집인으로서 다대한 기여를 하니 ‘민족혁명당의 영혼’으로 일컬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가서 당원들의 지하공작 및 대적선전방송을 지휘하였고,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훈반 한인학생대의 교관이 되어 항일군가 「최후의 결전」을 작사하고 널리 불리게끔 했다. 이어서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준비를 도와 성사시키고 정치조 부조장과 훈련주임을 역임했다. 동포들이 많이 살고 무장 항일활동이 가능해질 화북전선으로의 병력 이동을 김원봉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승인받고, 1941년 북상지대의 정치위원이 되어 휘하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지구로 들어가 대일작전을 벌여가기 시작했다. 1942년 5월부터 대대적으로 개시된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서는 ‘반소탕전’을 팔로군과 함께 전개하다 피격된 끝에 6월 3일 태항산 장자령에서 숨을 거두어 순국하였다. 198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중국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묘가 조성되어 있다.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본명은 서영윤(徐永潤)이고, 서영림(徐永林)이라는 이명도 썼다. 1893년 3월 23일, 경북 달성군 성북면 산격리(현 대구 북구 산격동)에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혼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1월 단기과정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6월경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의 신설 분교에 들어온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고, 10월에 졸업생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등 무기류의 구입이 상해에서 성사되자 단장 김원봉의 명에 의해 1920년 3월경 서울로 잠입하여 인사동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 요원으로 지명 받고 대기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단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이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연이어 붙잡혀가자 민첩하게 피신하여 상해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의열단 본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에는 상해에 남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가 1922년 7월경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독일로 갔는데, 1923년 5월 28일 괴한의 피습을 받아 사망했다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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