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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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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金大池, 1891~1943)

김대지(金大池, 1891~1943) 金大地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호는 일봉(一峰)이고 김태일(金太一)·김치환(金致煥) 등의 여러 이명을 쓰기도 했다. 1891년 10월 7일 밀양도호부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47번지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사립 동화학교를 다녔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전홍표 교장의 발탁으로 중학과정의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인재양성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원봉·김상윤·최수봉 등이 그때의 제자들이었다. 1913년경 밀양에서 구영필·이수택·황상규 등과 함께 일합사를 설립하여 항일운동 조직으로 운영하다 1918년 2월경 경찰에 체포되었고, 손톱 여덟 개가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기소된 후 4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구영필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봉천 등지에서 재류하고 있다가, 1919년 3월경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헌장 제정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내무부의 9인 위원 중 1인으로도 선임되었다. 11월에는 국내조사원으로 밀양에 특파되어 몇몇 재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헌납 받아 상해로 갖고 갔다. 1920년 3월,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을 위한 무기류 구입을 위해 길림에서 상해로 온 김원봉 등 단원 4인을 도와 폭약과 탄피 구입이 가능토록 해주고, 프랑스조계 보창로의 자기 집에서 폭탄 3개를 완제토록 하였다. 또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코자 안동현으로 우송하는 데도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3~24년에도 상해에서 김원봉에게 의열단의 활동계획에 관해 매번 상의를 받고 의견을 내주는 고문 역할을 맡아했으며, 인각에 능한 특기를 발휘하여 ‘의’(義) 자의 윗변에 해당하는 양(羊)의 형체를 그려 넣은 의열단의 비밀인장도 고안해주었다. 이렇게 밀양 출신 청년 독립투사들의 맏형 격 위치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지도하여 의열투쟁의 새 장을 열게끔 해주고 있던 그는 1926년 문창범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로 가려다 구영필의 요청으로 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머물러있게 되었다. 거기서 한동안 민족유일당운동에 진력하다 1933년 아성현 취원창으로 옮겨가 극빈 속에 한의술을 베풀며 살던 중, 1943년 음력 10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서훈 승격되었다. 취원창의 묘지가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니, 2003년에 경주 인근의 신선사 옆에 유족이 가묘를 조성하였다.
한봉근(韓鳳根, 1894-1958)

한봉근(韓鳳根, 1894-1958) 아호가 금산(錦山)이던 그는 1894년 10월 23일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후쿠오카상업학교를 1년씩 다니며 수학했다. 20세 때부터 숙부 한춘옥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인 1919년 3월, 만주에 가 있으면서 신흥중학교에 다니는 아우 한봉인과의 연락 여부를 탐지코자 가택수색을 나온 순사를 구타하여 상해죄로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지자 만주행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독립군정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황상규의 권유로 7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1월말에 졸업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창단 취지에 호응하여 동참 의사를 미리 표해놓았었기에 창립단원 반열에 서게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이 추진해간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참여키 위해 1920년 3월경 밀입국하여 밀양 본가에 가있으면서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거사 때의 투탄요원으로 지명 받았다.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은신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밀고에 의해 1920년 6월 하순부터 경찰에 속속 체포되고 말아 거사결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도 밀양에서 붙잡혀갔으나 1차 조사만 받고 방면되었다. 그 무렵 일시 귀국해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과 동행하여 1921년 봄에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냈다. 1923년 초에 상해로 가서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고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어, 이후의 거사계획과 그 추진과정에 계속 관여하였다. 1926년 4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국내의거를 추진 중이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으로부터 폭탄 및 권총‧실탄 구입 의뢰를 받아 이행하였고, 나석주‧류자명·이승춘 3인과 함께 거사요원이 되어 동반 입국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나석주만 12월에 밀입국하여 서울에서 동척·식은 투탄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의거계획의 가담자였음이 드러나 재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광동성 광주로 옮겨가 활동하였기에 피체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28년경에 영고탑으로 돌아가 한춘옥의 농장에서 지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고, 내내 부산에서 거주하다 195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호는 해영(海影)이고, 이명은 신우동(申愚童), 신우룡(申愚龍), 신룡(申龍)이었다. 1898년 5월 17일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치사리(현 대가야읍 고아리)에서 집안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하여 다니다 1918년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10월경 봉천에서 만나 뜻이 통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길림으로 가서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들과 합류하여 동지가 되고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고 단원이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기획, 추진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해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에서 폭탄 등 무기류를 구입한 때인 1920년 3월경, 명에 의해 동지들과 밀입국하여 경남 밀양으로 가서 한봉근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리고 4월 중순에 찾아온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의 일원으로 지명 받고 수락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 단원들이 연이어 체포되기 시작하니 재빨리 피신했는데, 그도 결국 7월 하순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6월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다 위장병이 심해져 1925년 7월 2일 가출옥 석방되었다. 1927년 9월 신간회 고령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1년 후 상무집행위원이 되어 변희용 지회장을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청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0년 1월 23일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본명은 서영윤(徐永潤)이고, 서영림(徐永林)이라는 이명도 썼다. 1893년 3월 23일, 경북 달성군 성북면 산격리(현 대구 북구 산격동)에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혼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1월 단기과정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6월경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의 신설 분교에 들어온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고, 10월에 졸업생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등 무기류의 구입이 상해에서 성사되자 단장 김원봉의 명에 의해 1920년 3월경 서울로 잠입하여 인사동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 요원으로 지명 받고 대기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단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이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연이어 붙잡혀가자 민첩하게 피신하여 상해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의열단 본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에는 상해에 남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가 1922년 7월경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독일로 갔는데, 1923년 5월 28일 괴한의 피습을 받아 사망했다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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