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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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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李鍾岩, 1896~1930)

이종암(李鍾岩, 1896~1930) 본명은 이종순(李鍾淳)이고, 외가 성을 따서 양건호(梁建浩)·양주평(梁州平)·양근오(梁槿吾) 등의 가명을 만들어 썼다. 1896년 음력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 백안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서 하급 이관(吏官)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들어간 대구농림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학비 조달이 어려워 잇달아 중퇴하였다. 그 후 독학하다 1914년 고모부의 후견으로 대구은행에 취직하고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여 결혼도 했다. 1917년 12월 은행에 입금된 1만 5백여 원의 거금을 빼돌려 잠적했다가 이듬해 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만주 봉천에서 만난 구영필(具榮佖)에게 7천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맡기고 4월에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로 가서 신흥중학교에 편입학하였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신흥무관학교로 옮겨갔고, 거기서 만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10월에 동창생 졸업자들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12월에 국외망명 때의 휴대금 중 잔액 3천원을 창단 직후 기획된 제1차 국내의거용 폭탄 등의 구입비로 제공하여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로 내려가 무기류를 구입할 수 있게끔 도왔다. 거사계획 실행을 위해 1920년 3월부터 속속 밀입국한 거개의 단원들과는 달리 단장의 명으로 상해에 잔류해 있다가, 거듭 지연되는 거사계획 추진실황의 점검을 명받아 1920년 7월 밀입국하였다. 단원 대부분이 경찰에 피체되었음을 알고는 남은 단원만으로라도 결행할 것을 시도했으나, 구영필의 사주를 받은 폭탄 관리자 이수택(李壽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 후 김상윤(金相潤)과 함께 밀양에 은신해 있던 중 만난 최수봉(崔壽鳳)에게 고인덕(高仁德)과 함께 제조한 폭탄 2개를 제공하여 12월 27일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실행케 하였다. 그리고는 서울로 옮겨가 은신해 있다가 1921년 12월 중국으로 탈출하여 북경의 단 본부로 가서 합류하였다. 1922년 3월 28일, 일제 군부의 거물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을 암살코자 의열단이 감행한 상해 황포탄 의거 때 오성륜·김익상에 뒤이은 제3선 저격수로 나섰으나 투척한 폭탄의 불발로 목적달성에 실패했는데, 현장 즉시탈출과 교묘한 변장으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 후 의열단 기밀부의 일원이 되어 간부로 활약했고, 단내 노선논쟁에서는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 단원들에 맞서 민족주의 노선을 고수하였다. 그 후 몇 차례 시도된 의열단의 광역 대규모 거사계획이 여러 이유로 실패함에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에 가 있다가 1925년 7월 폭탄 2개 등의 무기류를 휴대하고 단신 밀입국하였다. 1만원의 자금이 마련되면 일본 도쿄로 직행하여 폭탄거사를 감행하려 해서였다. 그러나 입국 전부터 동정이 밀보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던 나머지 1925년 11월 5일 대구 외곽의 은신처를 급습 당해 체포되고 말았고, 만 1년 후에 ‘경북 의열단사건’으로 신문 지면에 대서특필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법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얻은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매우 악화되고서야 1930년 5월에 가출옥되었으나 열흘 만인 5월 29일,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어 공훈이 기려졌다.
강세우(姜世宇, 1901~ ?)

강세우(姜世宇, 1901~ ?) 본명은 강비호돌(姜飛虎乭)이고, 일제 첩보문서에 강세위(姜世偉)로 적힌 경우도 있다. 1901년 8월 12일,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중평장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경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분교의 속성과정으로 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옮겨갔고, 거기서 만난 김원봉과 뜻이 통하여 장차 행동을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 10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가서 영어전수학교를 거쳐 중화대학에 입학하였고, 12월에 김원봉·곽재기 등이 한 달 전 창립한 의열단의 제1차 국내의거를 위한 폭탄을 구입코자 상해로 갔을 때 재회하고 합류하여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경 금릉대학에도 다녔다고 하며, 1925년에는 광동성 광주로 가서 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중국·인도·베트남·타이완 출신의 반제·반일 활동가들과 함께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1926년 8월 중산대학에서 열린 국치기념대회를 회장이 되어 주관하였고, 11월에는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중국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어 김원봉과 함께 무한(武漢) 방면으로 가서 북벌전에 참가하다 1927년 북경으로 옮겨가 의열단 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8년 중국군의 영관 장교로 복무 중이었음을 끝으로 그 후의 행적과 몰년은 미상이다.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신철휴 (申喆休, 1898 ∼ 1980) 호는 해영(海影)이고, 이명은 신우동(申愚童), 신우룡(申愚龍), 신룡(申龍)이었다. 1898년 5월 17일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면 치사리(현 대가야읍 고아리)에서 집안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하여 다니다 1918년 사직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9년 10월경 봉천에서 만나 뜻이 통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길림으로 가서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 신흥무관학교 졸업자들과 합류하여 동지가 되고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고 단원이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기획, 추진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해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에서 폭탄 등 무기류를 구입한 때인 1920년 3월경, 명에 의해 동지들과 밀입국하여 경남 밀양으로 가서 한봉근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리고 4월 중순에 찾아온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의 일원으로 지명 받고 수락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 단원들이 연이어 체포되기 시작하니 재빨리 피신했는데, 그도 결국 7월 하순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6월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경성감옥에서 복역하다 위장병이 심해져 1925년 7월 2일 가출옥 석방되었다. 1927년 9월 신간회 고령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1년 후 상무집행위원이 되어 변희용 지회장을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경북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청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0년 1월 23일 별세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곽재기(郭在驥, 1893 ~ 1952) 자는 경(敬)이고, 김광삼(金光三)·김재만(金在萬)이라는 가명을 썼다. 1893년 2월 7일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의 농민가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신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귀향하여 1907년 광남학교(1년 후 청남학교로 개명) 교사가 되었다. 1909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단)에도 가입,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청주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하여 피체, 구금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되어 풀려났다. 동년 7월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회계과장인 황상규를 만나 작탄투쟁을 위한 청년결사대 조직에 합의하고 구체적 방안을 숙의하였다. 10월에 김원봉이 규합해 온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 및 신철휴·윤세주와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여 부단장이 되었다. 12월에 김원봉·이성우·이종암과 함께 상해로 가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16개와 권총 2정, 탄환 100발 등 무기류를 구입하여 안동현을 거쳐 국내로 밀송, 반입되게끔 하였다. 1920년 3월 20일경 밀입국하여 밀양으로 가서 신철휴·윤세주·한봉근을 투탄결행 요원으로 지명하였고, 서울 공평동 전동여관에 거처를 잡고 거사 지휘소로 삼았다. 경남 창원군 강상진의 집에 숨겨둔 폭탄 13개의 보관 책임자인 이수택에게 조속 결행의 뜻을 수차 전하고 넘겨주기를 요구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당하여 미뤄지고 있던 중에 6월 20일 서울에서 이성우·윤세주가 은신처 급습을 받아 경찰에 붙잡혀갔음을 알고 급히 피신하여 부산으로 갔다가 7월 5일 체포되었다. 8개월여의 경찰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어서는, “재작년 3월 이래로 조국독립을 입과 붓으로는 구할대로 구하고 원할대로 원하였으나 피로써 구한 일은 없었음에서, 무기를 사용하여 혈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군함도 대포도 없이 오직 폭발탄과 육혈포밖에 구할 것이 없었노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1월 만기 출옥하였다. 1952년 1월 10일 별세하였고,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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