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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575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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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李成宇, 1899 ∼ 1929)

이성우 (李成宇, 1899 ∼ 1929) 이명은 이동소(李同韶)이고, 李誠宇로 표기되기도 했다. 원적은 함경북도 경원군 송하면 송하리인데, 중국 길림성 동녕현 소수분에서 이주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결혼하고 얼마 후인 1918년에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분교의 속성과정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만나 의기투합한 김원봉의 권유로 교관 서상락 및 졸업생 김상윤·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함께 10월에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 및 사용법을 익히고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였다. 창단 직후 기획된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해 12월에 김원봉 등과 함께 상해로 가서 16개의 폭탄 제조용 탄피 및 폭약과 권총 2정 및 탄환 100발을 구입하여 안동현으로 운반하고 국내로 밀송되게끔 했다. 1920년 5월에 서울로 잠입하여 거사결행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 첩보를 입수하고 검거에 나선 경기도경찰부에 은신처인 인사동 여관이 6월 20일 급습당하여 최초의 피체 단원이 되고 말았다. 단장 김원봉의 신임이 두터운 선임단원으로서 활동이 많았고 적극적이었던 만큼 ‘수범’(首犯)으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아 함경북도 청진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거기서 김재봉 등 장기수 3인과의 공모로 1922년 8월 20일 탈옥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다시 붙잡혔다. 1928년 3월 8일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옥중에서 3년간 앓은 복막염과 늑막염으로 너무 쇠약해진 몸이라 바로 귀향하질 못하고 밀양의 동지들에게로 가서 요양하던 중 1929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호는 석정(石正)이고, 잘 알려진 이명은 윤소룡(尹小龍)이었다. 1900년 6월 2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에서 태어나, 이웃집의 약산 김원봉과 죽마고우로 자랐고 평생 동지가 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오성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의 항일결사 일합사에도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밀양면 독립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길림에서 황상규·김원봉과 재회하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였다. 창단 직후 기획되어 1920년 3월부터 추진되어간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동참코자 국내 잠입한 후 서울 인사동에 은신하며 대기하였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6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의거 결행은 좌절되고말았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는 중에도 간수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굴복시킬 정도의 결기를 드러냈다. 1927년 출옥 후 신간회 밀양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활동했고, 민족지로 거듭난 중외일보의 서무부장, 경남인쇄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며 부산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중국으로 재망명하여,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 2기와 3기의 교관이자 ‘김원봉의 오른팔’이 되어, 항일청년투사 양성과 졸업생의 국내·만주 특파공작을 주관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선전부 상무위원으로서 1935년 통일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창당 후에는 훈련부장과 당보 편집인으로서 다대한 기여를 하니 ‘민족혁명당의 영혼’으로 일컬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가서 당원들의 지하공작 및 대적선전방송을 지휘하였고,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훈반 한인학생대의 교관이 되어 항일군가 「최후의 결전」을 작사하고 널리 불리게끔 했다. 이어서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준비를 도와 성사시키고 정치조 부조장과 훈련주임을 역임했다. 동포들이 많이 살고 무장 항일활동이 가능해질 화북전선으로의 병력 이동을 김원봉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승인받고, 1941년 북상지대의 정치위원이 되어 휘하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지구로 들어가 대일작전을 벌여가기 시작했다. 1942년 5월부터 대대적으로 개시된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서는 ‘반소탕전’을 팔로군과 함께 전개하다 피격된 끝에 6월 3일 태항산 장자령에서 숨을 거두어 순국하였다. 198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중국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묘가 조성되어 있다.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본명은 서영윤(徐永潤)이고, 서영림(徐永林)이라는 이명도 썼다. 1893년 3월 23일, 경북 달성군 성북면 산격리(현 대구 북구 산격동)에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혼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1월 단기과정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6월경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의 신설 분교에 들어온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고, 10월에 졸업생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등 무기류의 구입이 상해에서 성사되자 단장 김원봉의 명에 의해 1920년 3월경 서울로 잠입하여 인사동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 요원으로 지명 받고 대기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단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이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연이어 붙잡혀가자 민첩하게 피신하여 상해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의열단 본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에는 상해에 남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가 1922년 7월경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독일로 갔는데, 1923년 5월 28일 괴한의 피습을 받아 사망했다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아호는 약산(若山)이고, 중국에서는 진국빈(陳國斌) 등의 가명도 썼다. 1898년 음력 3월 1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김주익의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일장기 모독의 의거를 벌여 퇴학당하고 을강 전홍표가 교장인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와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 등에서 수학했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대로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배우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졸업 후 길림으로 데리고 가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사이에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추동한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하여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광동성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근 150명의 항일투사 겸 장래의 민족간부를 양성해냈다.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국외지역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일대 통합체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됨을 주도하여 의열단을 해체하고, 당 서기부장을 거쳐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쥐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 10월 무한에서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총대장이 되었고, 그 후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면서 대적선전공작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려갔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를 북상시켜 화북지역에서 대일작전을 벌여가도록 했으며, 화중·화남지역의 잔여 부대원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하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 29년 만인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니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안고 12월 2일에 환국하였다. 그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했으나, 영화 <암살>로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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