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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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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우(姜世宇, 1901~ ?)

강세우(姜世宇, 1901~ ?) 본명은 강비호돌(姜飛虎乭)이고, 일제 첩보문서에 강세위(姜世偉)로 적힌 경우도 있다. 1901년 8월 12일, 함경남도 삼수군 삼남면 중평장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경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분교의 속성과정으로 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옮겨갔고, 거기서 만난 김원봉과 뜻이 통하여 장차 행동을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 10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상해로 가서 영어전수학교를 거쳐 중화대학에 입학하였고, 12월에 김원봉·곽재기 등이 한 달 전 창립한 의열단의 제1차 국내의거를 위한 폭탄을 구입코자 상해로 갔을 때 재회하고 합류하여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경 금릉대학에도 다녔다고 하며, 1925년에는 광동성 광주로 가서 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중국·인도·베트남·타이완 출신의 반제·반일 활동가들과 함께 ‘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으며, 1926년 8월 중산대학에서 열린 국치기념대회를 회장이 되어 주관하였고, 11월에는 의열단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직후 중국 국민혁명군의 장교가 되어 김원봉과 함께 무한(武漢) 방면으로 가서 북벌전에 참가하다 1927년 북경으로 옮겨가 의열단 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8년 중국군의 영관 장교로 복무 중이었음을 끝으로 그 후의 행적과 몰년은 미상이다.
한봉근(韓鳳根, 1894-1958)

한봉근(韓鳳根, 1894-1958) 아호가 금산(錦山)이던 그는 1894년 10월 23일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후쿠오카상업학교를 1년씩 다니며 수학했다. 20세 때부터 숙부 한춘옥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인 1919년 3월, 만주에 가 있으면서 신흥중학교에 다니는 아우 한봉인과의 연락 여부를 탐지코자 가택수색을 나온 순사를 구타하여 상해죄로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지자 만주행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독립군정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황상규의 권유로 7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1월말에 졸업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창단 취지에 호응하여 동참 의사를 미리 표해놓았었기에 창립단원 반열에 서게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이 추진해간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참여키 위해 1920년 3월경 밀입국하여 밀양 본가에 가있으면서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거사 때의 투탄요원으로 지명 받았다.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은신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밀고에 의해 1920년 6월 하순부터 경찰에 속속 체포되고 말아 거사결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도 밀양에서 붙잡혀갔으나 1차 조사만 받고 방면되었다. 그 무렵 일시 귀국해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과 동행하여 1921년 봄에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냈다. 1923년 초에 상해로 가서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고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어, 이후의 거사계획과 그 추진과정에 계속 관여하였다. 1926년 4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국내의거를 추진 중이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으로부터 폭탄 및 권총‧실탄 구입 의뢰를 받아 이행하였고, 나석주‧류자명·이승춘 3인과 함께 거사요원이 되어 동반 입국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나석주만 12월에 밀입국하여 서울에서 동척·식은 투탄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의거계획의 가담자였음이 드러나 재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광동성 광주로 옮겨가 활동하였기에 피체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28년경에 영고탑으로 돌아가 한춘옥의 농장에서 지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고, 내내 부산에서 거주하다 195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황상규(黃尙奎, 1890~1931)

황상규(黃尙奎, 1890~1931) 아호는 백민(白民)이고 별명이 관운장(關雲長)이었으며, 만주에서는 허택(許鐸)·허옥(許鈺)이라는 가명도 썼다. 1890년 4월 19일 밀양도호부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57번지의 빈농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업 이력은 불확실하나, 1909년부터 밀양 읍내의 밀흥야학교와 동화학교, 상동면 고명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1913년 이래로 항일비밀결사 광복단과 대한광복회, 일합사 조직에 연이어 가담해 활동하다 1918년 2월경 후자의 두 조직이 일경의 추적을 받아 와해되기 시작하자 만주로 탈출, 망명하였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 결성에 참여하여 재무를 맡았고,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부르짖은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1인이 되었다. 동년 4월 의군부가 조선독립군정사로 개편될 때 재무국 회계과장이 되었으며, 남경에서 올라온 처조카 김원봉으로 하여금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동지를 규합해오게끔 지도하고, 장차 맹렬한 항일활동을 전개해 갈 청년결사대 조직을 추진하였다. 그런 ‘산파’적 노력의 결과로 11월 10일 의열단이 조직되니 단장 추대를 고사하고 고문 역할만 맡았으며, 12월에는 대한군정서 길림분서(통칭 길림군정서)의 재무부장이 되어 군자금 조달에도 힘을 보탰다. 국내 적기관을 일제히 공격하려는 의열단의 제1차 거사계획에 호응하여 1920년 3월 서울로 몰래 들어와 은신 대기하면서 역시 밀입국한 부단장 곽재기 등의 거사준비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폭탄 16개 등 무기까지 밀반입되어 거사 결행만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밀고로 인해 다른 여러 단원들과 함께 6월 하순에 경찰에 붙잡혀갔고, 모진 고문에도 일체의 자백을 거부하고 1921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겪었다. 1926년 출옥하고 이듬해 신간회 밀양지회가 설립될 때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 1929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복대표대회에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니 본부 서무부장을 겸임하며 활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현지로 내려가 조사활동도 폈으나, 옥중에서 얻은 질병이 도진 탓에 귀향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2년 만인 1931년 9월 2일 영면 별세하였다. 수십 개 사회단체 공동주관의 사회장이 거행되고 많은 조문객이 애도했으리만큼 독립지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졌던 그는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이로서 밀양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이에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대지(金大池, 1891~1943)

김대지(金大池, 1891~1943) 金大地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호는 일봉(一峰)이고 김태일(金太一)·김치환(金致煥) 등의 여러 이명을 쓰기도 했다. 1891년 10월 7일 밀양도호부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47번지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에 사립 동화학교를 다녔고, 1910년 경술국치 후 전홍표 교장의 발탁으로 중학과정의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인재양성의 일익을 담당했다. 김원봉·김상윤·최수봉 등이 그때의 제자들이었다. 1913년경 밀양에서 구영필·이수택·황상규 등과 함께 일합사를 설립하여 항일운동 조직으로 운영하다 1918년 2월경 경찰에 체포되었고, 손톱 여덟 개가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기소된 후 4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구영필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봉천 등지에서 재류하고 있다가, 1919년 3월경 상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헌장 제정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내무부의 9인 위원 중 1인으로도 선임되었다. 11월에는 국내조사원으로 밀양에 특파되어 몇몇 재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헌납 받아 상해로 갖고 갔다. 1920년 3월, 의열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을 위한 무기류 구입을 위해 길림에서 상해로 온 김원봉 등 단원 4인을 도와 폭약과 탄피 구입이 가능토록 해주고, 프랑스조계 보창로의 자기 집에서 폭탄 3개를 완제토록 하였다. 또한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코자 안동현으로 우송하는 데도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3~24년에도 상해에서 김원봉에게 의열단의 활동계획에 관해 매번 상의를 받고 의견을 내주는 고문 역할을 맡아했으며, 인각에 능한 특기를 발휘하여 ‘의’(義) 자의 윗변에 해당하는 양(羊)의 형체를 그려 넣은 의열단의 비밀인장도 고안해주었다. 이렇게 밀양 출신 청년 독립투사들의 맏형 격 위치에서 후배들을 이끌고 지도하여 의열투쟁의 새 장을 열게끔 해주고 있던 그는 1926년 문창범의 초청을 받고 러시아로 가려다 구영필의 요청으로 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머물러있게 되었다. 거기서 한동안 민족유일당운동에 진력하다 1933년 아성현 취원창으로 옮겨가 극빈 속에 한의술을 베풀며 살던 중, 1943년 음력 10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서훈 승격되었다. 취원창의 묘지가 옥수수 밭으로 바뀌어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니, 2003년에 경주 인근의 신선사 옆에 유족이 가묘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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