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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의불꽃'
의열기념공원
의열기념공원
"의열(義烈)"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전국 최초로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의열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대표적
의열활동 단체인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의열활동을 구현한 체험관입니다.
의열체험관 예약안내
독립투사의 의열활동을 체험해보세요.
관람시간 : 10:00~17:30 (마지막 입장 16:45)
휴관일 : 1월 1일 / 설날·추석 당일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국경일인 경우 개관, 다음날 휴관)
055-359-4733

의열단 창립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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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서상락(徐相洛, 1893 ~ 1923) 본명은 서영윤(徐永潤)이고, 서영림(徐永林)이라는 이명도 썼다. 1893년 3월 23일, 경북 달성군 성북면 산격리(현 대구 북구 산격동)에서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결혼 후 혼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8년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1월 단기과정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1919년 6월경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의 신설 분교에 들어온 김원봉과 뜻을 같이하고, 10월에 졸업생 김상윤·이성우·이종암 등과 함께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한 후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단의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위한 폭탄 등 무기류의 구입이 상해에서 성사되자 단장 김원봉의 명에 의해 1920년 3월경 서울로 잠입하여 인사동에 은신처를 정하고,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투탄조 요원으로 지명 받고 대기하였다. 그러다 거사 결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6월 20일부터 단원 이성우·윤세주·김기득 등이 첩보에 의해 검거작전을 벌인 경기도경찰부에 연이어 붙잡혀가자 민첩하게 피신하여 상해의 본부로 귀환하였다. 의열단 본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에는 상해에 남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가 1922년 7월경 모종의 임무를 띠고 독일로 갔는데, 1923년 5월 28일 괴한의 피습을 받아 사망했다 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김원봉(金元鳳, 1898 ~ 미상) 아호는 약산(若山)이고, 중국에서는 진국빈(陳國斌) 등의 가명도 썼다. 1898년 음력 3월 1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에서 김주익의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밀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일장기 모독의 의거를 벌여 퇴학당하고 을강 전홍표가 교장인 동화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와 중국 천진의 덕화학당 등에서 수학했다.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 간부인 고모부 황상규의 지도대로 유하현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배우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졸업 후 길림으로 데리고 가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1926년까지 사이에 상해·북경·천진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세 차례 추동한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를 비롯하여 23차례의 크고 작은 대일거사를 의열단이 기획하고 벌여나간 과정을 총지휘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을 군사·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단원들과 함께 광동성 광주의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1929년 북경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1932년에는 남경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고, 근 150명의 항일투사 겸 장래의 민족간부를 양성해냈다. 1935년 7월 5일 남경에서 국외지역 9개 독립운동단체들의 일대 통합체로 ‘민족혁명당’이 창립됨을 주도하여 의열단을 해체하고, 당 서기부장을 거쳐 총서기가 되어 실권을 쥐었다. 중일전쟁 발발 1년 후인 1938년 10월 무한에서 중국관내 최초의 한인부대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총대장이 되었고, 그 후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면서 대적선전공작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려갔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병력의 상당수를 북상시켜 화북지역에서 대일작전을 벌여가도록 했으며, 화중·화남지역의 잔여 부대원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재편하고 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조국과 고향을 떠난 지 29년 만인 1945년, 8.15 해방을 맞으니 부인 박차정의 유골을 안고 12월 2일에 환국하였다. 그 후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미상이다.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했으나, 영화 <암살>로 그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봉근(韓鳳根, 1894-1958)

한봉근(韓鳳根, 1894-1958) 아호가 금산(錦山)이던 그는 1894년 10월 23일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업학교와 일본 후쿠오카상업학교를 1년씩 다니며 수학했다. 20세 때부터 숙부 한춘옥의 운송·잡화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인 1919년 3월, 만주에 가 있으면서 신흥중학교에 다니는 아우 한봉인과의 연락 여부를 탐지코자 가택수색을 나온 순사를 구타하여 상해죄로 기소되고 벌금형에 처해지자 만주행을 결심하고 길림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독립군정사의 간부로 일하고 있는 황상규의 권유로 7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1920년 1월말에 졸업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창단 취지에 호응하여 동참 의사를 미리 표해놓았었기에 창립단원 반열에 서게 되었다. 창단 직후부터 의열단이 추진해간 제1차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참여키 위해 1920년 3월경 밀입국하여 밀양 본가에 가있으면서 부단장 곽재기로부터 거사 때의 투탄요원으로 지명 받았다. 그런데 서울 등지에서 은신 대기 중이던 단원들이 밀고에 의해 1920년 6월 하순부터 경찰에 속속 체포되고 말아 거사결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도 밀양에서 붙잡혀갔으나 1차 조사만 받고 방면되었다. 그 무렵 일시 귀국해 있던 고종사촌 구영필과 동행하여 1921년 봄에 북만주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지냈다. 1923년 초에 상해로 가서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고 5인 참모부의 일원이 되어, 이후의 거사계획과 그 추진과정에 계속 관여하였다. 1926년 4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국내의거를 추진 중이던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으로부터 폭탄 및 권총‧실탄 구입 의뢰를 받아 이행하였고, 나석주‧류자명·이승춘 3인과 함께 거사요원이 되어 동반 입국하기로 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나석주만 12월에 밀입국하여 서울에서 동척·식은 투탄의거를 감행하였다. 이 의거계획의 가담자였음이 드러나 재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광동성 광주로 옮겨가 활동하였기에 피체되지는 않았다. 그 후 1928년경에 영고탑으로 돌아가 한춘옥의 농장에서 지내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고, 내내 부산에서 거주하다 1958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윤세주(尹世胄, 1900 ~ 1942) 호는 석정(石正)이고, 잘 알려진 이명은 윤소룡(尹小龍)이었다. 1900년 6월 24일 밀양군 노하동(현 밀양시 내이동) 880번지에서 태어나, 이웃집의 약산 김원봉과 죽마고우로 자랐고 평생 동지가 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오성학교를 졸업하고 밀양의 항일결사 일합사에도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밀양면 독립만세시위를 기획,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길림에서 황상규·김원봉과 재회하고 11월 10일의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였다. 창단 직후 기획되어 1920년 3월부터 추진되어간 국내 적기관 일제공격 거사에 동참코자 국내 잠입한 후 서울 인사동에 은신하며 대기하였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6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의거 결행은 좌절되고말았다.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는 중에도 간수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굴복시킬 정도의 결기를 드러냈다. 1927년 출옥 후 신간회 밀양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로 활동했고, 민족지로 거듭난 중외일보의 서무부장, 경남인쇄주식회사 이사 등을 역임하며 부산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중국으로 재망명하여,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 2기와 3기의 교관이자 ‘김원봉의 오른팔’이 되어, 항일청년투사 양성과 졸업생의 국내·만주 특파공작을 주관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선전부 상무위원으로서 1935년 통일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창당 후에는 훈련부장과 당보 편집인으로서 다대한 기여를 하니 ‘민족혁명당의 영혼’으로 일컬어졌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로 가서 당원들의 지하공작 및 대적선전방송을 지휘하였고,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특훈반 한인학생대의 교관이 되어 항일군가 「최후의 결전」을 작사하고 널리 불리게끔 했다. 이어서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준비를 도와 성사시키고 정치조 부조장과 훈련주임을 역임했다. 동포들이 많이 살고 무장 항일활동이 가능해질 화북전선으로의 병력 이동을 김원봉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승인받고, 1941년 북상지대의 정치위원이 되어 휘하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지구로 들어가 대일작전을 벌여가기 시작했다. 1942년 5월부터 대대적으로 개시된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서는 ‘반소탕전’을 팔로군과 함께 전개하다 피격된 끝에 6월 3일 태항산 장자령에서 숨을 거두어 순국하였다. 198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중국 하북성 한단시의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묘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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